• 최종편집 2019-1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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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보경사 적광전’ 보물 지정 예고
        경북 포항시에 위치한 ‘보경사 적광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보경사 연기(절을 짓게 된 유래 등에 대한 설화)에 따르면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 법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또 1588년 사명대사 유정이 지은 ‘내연산보경사금당탑기’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4년(745)에 승려인 철민 화상이 중창(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의 적광전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기둥 상부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양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초석(기둥을 받치는 부재), 고막이(기둥 하부를 가로로 연결하는 부재를 받치는 부위) 등은 전형적 통일신라기 건축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면에 신방석(신방목의 받침석) 부재도 남아 있어 신라 시대 고부재를 사용해 중창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면 중심칸에는 사자를 조각한 신방목(문기둥 밑에 놓이는 부재)이 있는데 보통 둥글게 만들어 태극문양 등을 새기는 데 비해 그 조각이 정교하고 사자상을 취한 사례가 국내에는 드물어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에서는 측면에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를 두지 않으나 적광전은 예외적으로 측면에도 공포가 있다. 또 다포계임에도 우물반자(우물 정 ‘井’자 모양의 천장)를 설치하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낸 연등천장으로 처리한 것도 특징적이다. 문화재청은 ‘포항 보경사 적광전’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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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6
  • 의성 대곡사 대웅전’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의성 대곡사 대웅전’이 7월 3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831호로 승격 지정됐다고 밝혔다. ‘의성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원나라와 고려를 다니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 전한다.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라 명명했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되어 1605년(선조 38) 탄우(坦祐)대사가 대웅전과 범종각을 세우고, 1687년(숙종 13)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중건하면서 대곡사로 개칭했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1960년 앞 텃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후기 조성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과 고려 초기의 다층석탑 그리고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시구(探訪詩句)’ 등의 자료로 미루어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유구 등이 확인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대곡사의 중심 불전인‘대웅전’은 조선 중기 다포양식이며, 조선시대 사찰 법당으로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간소하나 공포는 내외 3출목-7포작, 팔작지붕으로 법당의 장엄함을 표현하고 있다. 대곡사 대웅전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공포의 동일한 내외 출목수, 배면 개구부의 창호구성(영쌍창), 불단의 배치, 건물 정면의 외부 마루 흔적 등은 중건 당시의 시기적 경향을 읽을 수 있는 모습으로 의성 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기 시작한 시대의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이성규 도 문화재과장은“우리도 문화재의 격을 높이는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금년에만‘의성 만취당’과‘의성 대곡사 대웅전’이 보물로,‘안동 토계동 향산고택’과 ‘청송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분가 고택’이 중요민속문화재로 승격 지정되는 결과를 얻었다”며, “앞으로, 승격 신청서류 작성에 따른 소요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추진에 심혈을 기울여, 도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체계적인 보존관리 및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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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7
  • (시) 책을 보다.
    책을 보다 槿岩/유응교 왜 사람들은 책을 본다고 얘기 할까 책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책을 느낀다고 하지 않고 책을 쓴이와 대화를 하지 않고 책을 보지만 말고 책을 눈으로만 읽지 마오. 책을 가슴으로 읽어다오. 책을 영혼으로 읽어다오. 책을 본다고 한 사람도 거실 앞의 TV만 보느라고 책을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 너무 바빠서 책을 볼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읽지는 못하고 슬쩍 보더라도 제발 책 좀 봐 주오. 그대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위하여 그대의 마음을 향기롭게 하기위하여 그대의 영혼을 빛내기 위하여 문화재 안내판   근암/유응교 우리나라 문화·관광부 나으리들은 하나같이 목수였나 보다. 관광 문화재 있는 곳마다 우리 국민에게 그토록 건축지식만을 주입하려 하는 걸 보면 지붕은 맞배지붕 박공에  팔작이요 기둥은 싸리기둥 안쏠림에 배흘림인데 공포는 다포에 주심포로 되어 있고 배치는 ㄷ자에 행랑채는 일자로다 이 모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 문화재에 얽히고설킨 기쁨과 슬픔은 어디로 가고 그 문화재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철학과 사상은 어디로 가고 그 문화재에 깃들어 있는 사랑과 이별은 어디로 가고 그 문화재에 오래 남아 있을 눈물과 웃음은 어디로 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건축물을 페인트 칠 벗겨진 안내판 속에 세워 놓는 것입니까. 그 문화재 속에 살다 간 사람의  가슴 따뜻한 얘기와 눈물과 웃음 그리고 깊은 정신은 모두 어디로 가고 없나요? 선생님 II 근암/유응교 솔밭 사이로 정갈하게 돋아난 한 그루 춘란이십니다.   눈보라 모진 바람에도 곧곧하게 서있는 대나무이십니다.   혼탁한 도시의 공원 모퉁이에 그윽히 피어난 6월의 장미이십니다.   거칠고 혼미한 먼 바닷길 홀로서서 밝히는 등대이십니다.   끝없이 일렁이는 험한 파도 조용히 받아주는 바다이십니다.    광주여! 근암/유응교   광주여! 무등산의 나래 아래 말이 없는 광주여!   금남로에 뿌려진 진달래 꽃잎들이 터지는 화염속에 시들어버린 광주여!   충장로 네거리에 외쳐진 자유의 함성들이 서릿발 같은 군화에 얼어 붙어버린 광주여!   전라도의 사투리 속에 정의를 부르짖던 골목마다 불의를 추구하던 대전차포가 지나간 광주여!   민심이 천심이랑깨 지금도 귓전에 남아있는 전라도 사투리도 허공을 가로질러 간 돌멩이도 불꽃 화염병도 5월의 태양 아래 무등산의 나래 아래 지금은 말이 없는 광주여! 오! 광주여!    기 도 1 槿岩/유응교 어둠이 내리는 깊은 밤 힘든 일과를 마친 후 한 줄의 詩를 쓰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이른 아침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 살아 있음을 기뻐하게 해 주소서 탐욕에 찌들은 혼탁한 눈빛을 거두고 맑고 투명한 비움의 시선을 갖게 하여 주시고 남을 비방 하거나 미워하는 말보다도 언제나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입을 갖게 해 주소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손으로 틈틈이 수채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쾌락을 찾아 신을 외면하는 추한 삶을 버리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발걸음이 되게 하소서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나 야니의 연주를 들으며 때때로 영혼을 일깨우는 소리에 귀 열게 하시며 돌 틈에 어렵게 핀 한 송이 꽃을 사랑케 하여 주시고 겨울의 찬 눈과 여름밤의 별빛을 사랑케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간까지 후회 없는 생으로 살아 왔노라고 자부 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아멘- 찔레꽃 내 고향 槿岩/유응교 멀고 먼 나라로 고향을 떠나 살아 보신 적이 있나요? 가난하게 살아도 고향이 좋고 지위가 낮아도 내 부모가 좋고 남루한 옷을 입어도 내 형제가 좋아요. 고향을 떠나 살아본 사람만이 제 심정을 아실 거 에요. 그러나 그리운 고향에 찾아 왔건만 부모 형제 이미 떠나시고 형제는 찾아 볼 수도 없이 고향집이 잡초에 묻혀 있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겠어요. 고향산천 골짜기 마다 개울가 마다 제가 소복을 입고 외롭게 울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아셨죠? 부모 형제 애타게 그리며 목 놓아 부르는 제 외침이 애잔한 향기로 바람결에 산천을 헤매는 까닭을 이제야 아셨죠? 고향은 외로운 마음의 안식처라고 하지만 흙먼지 속에 엎드려 울고 있는 저를 안아 주세요 전 지금 너무 외로워요. 부디 고향에 오시거든...
    • 뉴스광장
    2009-05-15
  • 이달(5월)의 추천 자연휴양림 국립용현자연휴양림
    산림청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소장 성부근)는 가야산의 수련한 경관을 벗 삼아 문화유적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을 이달 (5월)의 추천 자연휴양림으로 선정했다. ‘용현’의 또 다른 이름은 ‘강당이골’이다. 그 이름에 대한 유래는 불법을 설하는 강원이 있었다는 설과 보원사를 강당사라 불렀다는 설, 그리고 최치원 선생이 움막을 짓고 글을 가르치느라 글 읽는 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골짜기로 울려 퍼졌다하여 강당이골이라는 설이 있다. 용현자연휴양림은 해발 678m의 가야산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물이 풍부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5월이면 그 녹음만으로도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다. 또한 백제 천년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과 마음을 열어주는 ‘개심사(開心寺)’,  백제~조선시대까지  천년이상의 법맥을 유지했던 보원사(普願寺)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접해있다. 용현자연휴양림의 숙박시설로는 6인실 2실, 8인실 1실, 10인실 2실로 구성된 숲속의 집과 4인실 4실, 5인실 4실, 6인실 5실로 구성된 산림문화휴양관과 5인실 2실로 구성된 연립동이 마련되어 있으며 야영데크 20개소, 숲속교실 1개소, 서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능선을  따라 연결되는 등산로와 순환임도는 개심사와 서산목장길로 연결되어 산책과 등산이 용이하다. 특히 용현자연휴양림은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차로 1시간 30분, 대전에서 2시간, 평택, 안성, 천안 등의 중소도시에서   약 1시간의 거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양호하며 약 50분정도의 거리에 안면도국제 꽃박람회장(4.24~5.20)이 자리하고 있어 안면도와의 연계관광도 가능하다. □ 용현자연휴양림 정보    o 위    치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산 2-37번지    o 구역면적 : 999ha    o 개장연도 : 2005년 12월    o 수용인원 : 최대 800명/일, 최적 500명/일    o 이용문의 : (41)664-1971,8    o 찾아오시는 길 : www.huyang.go.kr 참조   용현자연휴양림 주변 문화유적지 현황   1. 서산마애삼존불(자연휴양림에서 5 분소요) : 국보 제 84호,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불상으로 1958년 발견되었다. 원래 해의 위치에 따라 서서히 변하는 미소의 모습으로 ‘백제의미소’라 불리고 있으나 풍화작용에 의한 부식 등을 막기 위해 전각을 설치하여 지금은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2. 개심사(자연휴양림에서 20분소요) : 가야산의 중심사찰로 백제 의자와 14년인 654년 혜감국사 창건하였다. 개심사 대웅전은 보물 제 143호로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시대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만개한 벚꽃은 속세의 시름을 잊은 선경에 와 있는 듯한 감동을 준다. 3. 보원사지(자연휴양림에서 3분소요) : 창건연대와 폐사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보원사지는 지방지인 『호산록』과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으로 이어지는 천년이상의 법맥을 유지했던 매우 중요한 가람이었다. 현재는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 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4. 해미읍성(자연휴양림에서 25분소요) :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 뉴스광장
    2009-04-22

오피니언 검색결과

  • (기고) 국내의 목조건축 변천사와 최신 트랜드
     (사)한국목구조기술인협회 회장 김 헌 중 <인류의 주거> 인류가 존재한 시기에는 항상 집이 있었고 집을 짓기 위한 재료로서 돌과 흙, 나무 등 자연에서 채취가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여 왔다. 현대 우리가 추구하는 친환경재료로서 주거를 해결한 것이었다. 신석기시대 추운 바람과 비를 피하며 살아가는 인류에게는 돌 뒤에 숨어 기대거나 동굴에 들어가 살다가 신석기시대의 수혈주거에서는 주변에서 구한 나무를 이용하여 서까래 등을 사용하는 건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사용한 나무를 이용한 건축을 목조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주거에는 반듯이 목재가 발견된 것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이유에서 일 것 이다. <전통건축> 한국에서의 목조건축은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움집에서부터 나무를 사용한 기록을 본다면 아마 오천년 정도의 역사를 가졌을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게 목재를 사용하였겠으나 목조건축이라 부를 정도는 중국전파의 영향이 있기는 하다. 다만 한국건축이나 일본건축은 결코 중국건축의 지방형식으로 유별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낙랑군에게서 고구려로,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진 중국계통의 주심포, 다포방식은 조선 초에 주심포가 사라지고 다포 만 남은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어 사용된 익공이라는 공포양식을 향교, 서원, 사당 등의 유교 건축물에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익공은 궁궐이나 사찰의 침전, 누각, 회랑 등 주요건물이 아닌 부차적 건물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건물들을 한옥이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옥은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형태적으로는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말살된 민족의 문화에 건축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전통한옥은 쇠퇴해가고 도시주변의 집장사들이 지어서 판 도시형 한옥만이 근근이 우리의 목조건축을 보존하는 정도였다. <시멘트 숲> 이로부터 어려운 경제난과 더불어 6.25 사변이 나고 전쟁 통에 더욱 궁핍한 생활에 의하여 주거는 도외시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판자 집에서 목조의 흔적은 조금 찾을 수 있었다. 정부에서 보존하는 문화재에서 만이 목조건축을 유지할 수 있었던 60년대에 우리의 건축에 획기적인 재료인 시멘트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만능인 시멘트 앞에서 목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빠른 건축, 경제적인 건축에 자연 친화성과 건강성을 가진 목조건축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또한 새마을 운동에 의하여 생태의 보고인 초가가 헐리고 마당을 낀 단독주택은 밀고 높다란 아파트가 지어졌다. 이때부터 우리는 콘크리트 아파트 숲에 갇히고 말았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강의 기적이 이뤄낸 부는 도심의 고층빌딩과 아파트단지를 전국에 전파하고 세련되고 편안한 시멘트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 초고속 부를 이룬 집단에서는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와 세컨하우스라는 특수 부유층의 소비 아이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통나무집> 80년대 초 필자를 비롯한 국내 1세대 목조건축업자들은 핀란드와 스웨덴 등지에서 기계식통나무집을 전체 구성 품이 담긴 키트로 들여와 시공하고 있었다. 기초에서 마감재 심지어는 액세서리까지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형태의 수입 통나무집을 들여온 것이다. 잘 자란 목재를 건조하고 기계가공으로 정밀하게 제작된 북유럽의 통나무집 자재에 가격으로 경쟁할 수 있는 구법의 북미식 핸드크랩팅 통나무집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에서도 국산형 통나무집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넛치와 스크라이버의 사용만으로 적층시킨 수공식 통나무집이 전국 각지에서 가든, 레스토랑, 별장 등으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통나무집 빌더가 몇 주만의 교육으로 수천 명씩 양성되었을 정도이다. 몇몇 전문빌더를 제외하고는 눈썰미를 자랑하며 체인톱 사용하는 방법만을 배워서 건조되지 않은 생재를 들여와 투박한 가분수의 통나무집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결국은 할열과 침하 등으로 통나무집은 누수가 되고 충해를 입어 패가로 만들어지는 하자발생으로 인하여 현재 국내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88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외국의 선수들이 일본에서 숙박을 하고서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다는 소문과 더불어 통나무집의 위력을 떨칠 때 쯤 국내에는 고가의 목조주택이 주부들의 로망이 되었다. 수도권 골프장 주변의 전원주택, 준 재벌급의 별장은 여지없이 북유럽과 북미에서 수입된 목조주택이었으니 서민들에게는 로망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자연휴양림> 80년 말 산림청에서는 산주들에게 산림에서 소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자연휴양림을 조성하였고 휴양림에서 휴식과 숙박의 공간인 숲속의 집을 짓게 되었는데 휴양림에는 친환경재료 만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축물은 목조건축이었다. 이로서 서민의 로망인 목조건축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와 때를 맞춰 국산 간벌목을 이용한 목조주택의 개발이 시작되었고 수입 자재로 만 지어지던 목조주택을 국산화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임업연구원에서 주도한 통나무집건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때에 가압방부목과 원주목을 이용한 조경수 지주목 생산과 설치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진 것 같다. 80년대 말 필자가 남보다 앞서 유럽식 목조주택 모듈을 국내에 도입하면서 경량목구조 주택이 상륙하게 되었다. 이미 백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식 경량목조주택을 접한 우리는 세로로 판자를 붙였던 판잣집의 기억에 가로로 적층된 것처럼 보이는 우드사이딩을 붙인 목조주택을 선호하게 되었다. 90년대 초 통나무집과 경량목조주택이 뒤엉켜 지어도 년 간 1,000동을 넘지 못하던 목조건축업계가 매년 100% 신장세를 누리면서 큰 기대감을 가지고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자재는 전량 수입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현장에서의 시공인력은 수입기술자로서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시공기술 인력이 부족한 이시기에 국산화를 위한 실험 건축으로 또는 기술부족의 부실공사로 많은 건축주들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학계와 산업계에서도 기술자의 관리와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요구한 시기였다 <목조주택> 외국 수입상들을 따라 진출한 미국임산물협회 등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고 경량목구조주택을 지어오던 업체들이 구심점을 찾게 되었고 한국목조건축협회가 설립되었다. 특히 미국 임산물협회가 물적 지원을 하면서 많은 교재가 보급되고 여러 단체에서 워크 삽을 열어 전원주택은 목조주택이라는 등식으로 폭발적인 수요를 만들었다. <기술인력 양성> 필자는 IMF국난의 시기가 기술인력 양성의 기회라 생각하고 목조건축전문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청년실직자 재취업훈련으로 시작하여 직업훈련으로 발전시켰고 현재는 년 간 1,000명의 인력을 현장에 배출하고 있다. 목조주택은 국제기준이 적용된 시공매뉴얼을 사용하고 한옥은 프리컷과 신한옥이 적용되었으며 시공자들이 3D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단계에 까지 발전하였다. <목조주택 보급> 90년대 말 합리적인 시공의 목조주택은 모두들에게 최상의 주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봉정사극락전, 무량수전, 수덕사대웅전 등 최고의 목조건물이 있다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동안 통나무집에서의 건강함과 기타의 유익함에 목조주택은 최상의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목조주택의 수명이 문화재와 같이 오백년을 가고 통나무집같이 습도를 조절하여 아토피와 천식이 없어진다는 과장광고에 모두들 목조주택을 짓다보니 년 간 300여개의 업체가 창업을 이루었다. 2000년 초 펜션이라는 형태의 숙박시설이 계곡마다, 해변에 줄지어 세워지고 투기의 수단까지 달릴 즈음 조금씩 목조주택을 살아보고 이해하기 시작한 건축주들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경량목조주택은 우리가 생각하던 목조주택과는 다른 것이었다. 내화성능과 단열성을 중시한 구조로 친환경적인 재료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우리의 전통건축과는 다른 건축양식이었기에 에너지를 절약하고 살기 편한 주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경량목조주택은 친환경 주택이라기보다는 편리한 생활을 위한 합리적인 건축이라고 생각이 바뀌면서 그동안 목조주택을 상징하던 우드 사이딩과 적삼목기와는 서서히 줄어들게 되고 외부 마감에는 기후에 강한 시멘트 사이딩과 스터코가 시공되기 시작하였으며 시스템창호로 단열을 보강하였다. <황토집 선호> 목조주택에서 건강성을 찾지 못한 건축수요자들은 예전의 통나무집에서 기능성을 찾을 수는 있으나 유지관리와 주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단점에서 포기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흙 건축인 황토 집에서 건강성을 찾게 되었다. 황토의 좋은 점과 더불어 우리의 고유자산이라는 난방방식인 구들에서 건강함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며칠씩 휴식하는 공간으로의 흙 건축은 성공적이었으나 계속 주거하고자 하는 공간으로는 황토집이 부담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습도의 조절과 원적외선 방출이라는 장점을 느끼기에는 시공과 유지관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한옥의 부흥> 2002년 월드컵의 유래 없는 4강 진출이라는 성과와 더불어 한옥의 우수성을 활용하는 도시가 있었고 이때에 목조주택을 접목시킨 공장제 한옥을 필자가 개발하여 보급하니 생활한옥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동안 한옥에서 살아오며 느꼈던 불편함과 고가의 건축비를 해결한다는 생활한옥은 모두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외형은 우리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사대부가의 고택이며 내부는 아파트의 구조를 가져 생활의 편리성을 가질 수 있는 평면으로 구성되었으면서도 평당 300만 원 대의 한옥은 실로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기계화 장치가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의 생활한옥 양산은 실험적이었으나 이 방식을 채택한 전라남도의 한옥보급은 성공적이었다. 2004년도부터 준비한 전남도의 한옥정책은 경험적인 도면으로 건축하던 한옥의 표준 도면 집을 만들어 보급하고 지원 조례를 제정하여 보조금을 지원한바 전국 한옥건축의 2/3를 차지하는 성장세를 가졌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2007년 한 스타일 산업진흥정책으로 한옥지원사업을 실시하고 2010년부터는 국토해양부의 한옥기술 R&D사업에 수백억을 지출할 정도로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국가건축정책위원회에서는 2020 한옥르네상스를 선도하고 있으며 한옥이 건축법에 정의되었고 신한옥이라는 발전된 한옥에서부터 아파트실내에 도입된 한옥인테리어까지 한옥의 적용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린홈 정책> 그러나 정서에 의존한 한옥의 보급만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에서 그린 홈이라는 큰 과실을 놓치고 있는 건축계의 입장을 바꾸고자 하는 임산공학계의 노력이 있어 왔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개발한 한그린을 비롯한 한국형 목조주택 등의 연구가 큰 성과를 나타냈다. 그 결과 비로소 국토해양부에서 한국형 목조건축 기술개발 및 산업화를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제 기획재정부와 국토해양부 등 범 정부적인 그린홈 정책에 더불어 목조건축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건축재료에 탄소배출권을 주는 목재의 비중을 높여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 목표달성의 시대적 .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친환경 건축문화와 전통주거문화를 계승 , 발전시킴은 물론 국내 목조건축산업과 임업 . 목재 부품소재 산업 등 경제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친환경주택의 기준> 우리는 친환경재료를 건축에 사용하여 건강에 좋으면 친환경주택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에너지를 절감하는 주택이 친환경주택이니 우리가 너무 이기적이지 아닐까 생각된다. 목재는 다른 재료에 비하여 탄소포집능력이 7배에 달하고 건축 시 발생하는 탄소가 1/4에 달하니 수십 배의 효과가 날것이며 4배의 단열성능을 지닌 목재를 이용하는 목조건축이야말로 우리가 사용하여야 할 건축 재료이며 지구를 살리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목재를 사용하면 두 가지를 다 충족시킬 수 있다. 친환경재료를 사용하니 건강성도 가질 수 있어 좋고 탄소를 절감하니 지구온난화 방지에도 좋다. <최신 트랜드 팀버프레임> 모두들 웰-빙을 위하여 친환경자재를 사용한 주택을 지으려하는 이유는 건강을 지키려는 것이다. 그중에 제일 많은 질환인 아토피와 천식을 피하고 싶다면 먼저 시멘트의 해로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 시멘트와 본드류의 사용을 지양하고 습도와 감정을 조절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목재 면을 많이 노출하여 접촉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요즈음 내부에 목재가 많이 드러나 건강성을 느끼게 하는 구조인 팀버프레임 주택이 뜨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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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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